본문 바로가기

그리고 나/신앙칼럼

[신앙칼럼] 우리 속의 탕자 형의 마음을 잠재워라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탕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목사님 설교나 교회에서 하는 성극에 자주 등장하는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곧잘 "탕자에 대한 비유"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성경에서 그들의 이름은 탕자가 아니라 다만 맏아들, 둘째 아들로만 나옵니다.

이 성극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둘째 아들 탕자와 아버지로 나옵니다.
탕자의 허랑방탕함과 아버지의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한 이 비유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에서 전혀 주목하지 않는 맏아들은 어떤 면에서 또다른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과 비교되게 맏아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아버지 곁을 지키며 늙은 아버지를 봉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전형적인 성실한 효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노함과 항변은 어찌보면 정당하고 당연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9-30)


경산중앙교회가 2009년도의 여러 어수선함을 뒤로 하고 안정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성실하게 이때까지 교회를 지키며 부흥을 이끌었던 맏아들같은 멤버들의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빠르게 안정을 잡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불만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에서 자기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그것이 섭섭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생겨나는 프로그램들이 내심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직분자인데 특별한 혜택없이 새로 생겨나는 프로그램들을 새로 다시 이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함께 했던 전임 교역자들의 이름이 잊혀져 감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요긴했던 물건들이 이제는 퇴물이 되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허전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추억이 주책이 되는 교회 분위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흥의 주역들이 이제는 부흥의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위축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더 이상 자기에게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 중요사를 결정했던 자기의 한마디가 이제는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것은 다 맏아들의 것입니다.(눅15:31)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자 역전의 용사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모세가 꿈에 그리던 가나안을 먼 발치 느보산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였듯이(신34:1-4)
이제 역전의 용사들은 조용히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물러앉을 때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종 여호수아는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삼십일을 애곡하였듯이 역전의 용사들을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기력이 쇠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임이 끝나면 물러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