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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신앙칼럼

[신앙칼럼] 목회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


어느 단체나 리더가 구성원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리더에게나 그 구성원들에게나 대단히 불행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리더는 리더로서의 존재 이유가 있는데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협력을 받아야 할 구성원들로부터 존재 가치를 의심받는다면 그것만큼 수치스럽고 힘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의 목표를 리더를 중심으로 구성원들과 협력하여 이루어야 하는데 리더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면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조직의 미래는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리더들은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고 노력을 하여 외부의 각종 위협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그 단체를 원하는 목표까지 이끌고자 불철주야 노력을 합니다.

교회의 리더인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들도 일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며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회나 교회나 리더들의 모습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구 제일교회 전경


 목회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런데 지금 교회 구성원인 많은 성도들은 리더들에 대한 인식에서 한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의 영적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지금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일반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쯤 정도로 여기고 끊임없이 그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장에서는 사장이나 회장 정도만큼도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 기업체의 사장이나 회장은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 대한 강력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해고나 파면, 아니면 징계에 의한 임금 삭감이라는 강력한 견제 수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목회자들은 도전해 오는 성도들에 대한 마땅한 견제 수단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목회자들이 스스로 그 권위를 떨어뜨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 성도들의 무지에 의한 경우가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전에 만난 한 집사님은 목사님에게  직접적으로 "촛대뼈를 깔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제가 엄청 놀랐습니다.
저 정도이면 회사라고 하면 당장 해고감입니다.
그러나 교회이다 보니 신고를 하는 사람도 없고 당사자가 직접 고소를 할 수도 없어서 은혜롭게(?) 잘 넘어갔습니다.

 유명무실한 교회의 징계 수단

초창기에는 교회에도 물론 징계 수단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교회의 중직자 자녀가 믿지 않는 사람과 불신 결혼을 하게 되면 아버지인 그 중직자는 교회에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장로이면 예배에서의 대표 기도를 일정 기간동안 중지당하거나 심하면 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치리 제도가 먹히지를 않습니다.
한 교회에서 징계를 당하면 다른 교회로 옮겨 버립니다.
문 밖만 나가면 늘린게 교회이니 한 곳에서 징계를 당하여 타교회로 가면 그 교회에서는 너무나 쉽게 받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의 치리 제도가 영향력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실례로 최근 이웃 동네에서는 중직자가 교회와 갈등이 생기자 그 교회를 박차고 나와서 그 교회 바로 코앞에 대형 교회를 세우고 다른 교단의 목회자를 모시더군요.


 목회자 권위의 출발점은 성경

목회자들의 권위는 성경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레위족속과 맞닿아 있습니다.
구약에서 레위 족속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관장한 것은 그들의 지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는 목회자들의 그 권위가 신학교를 졸업하여 성경에 박식한 사람으로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학교를 갓 졸업한 신임 목회자가 부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듯이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리집사를 임명받으면서 30대 초에 한 교회의 중고등부 부장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는 개척교회였기 때문에 전도사님을 모실 형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갓 집사를 임명받고 부장에 임명 받은 제가 중고등부 설교를 하여야만 했습니다.
중고등부라고 해 봐야 3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임명으로 저는 더듬거리며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당시 제자훈련 교사로서 한 팀을 이끌고 있기도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녀서 설교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륜에 의한 성경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일주일에 2편(제자 훈련은 5분 메세지)의 설교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니 저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제게 지혜를 주셔서 크게 무리없이 중고등부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갓 입사하였는데 회사 상사의 무분별한 지시로 인한 갈등과 업무 스트레스가 쌓이니 설교문 작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보통 설교문은 퇴근 후 화요일에 초고를 잡기 시작하여 목요일쯤에 탈고를 하여 주일에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갈등이 생기니 성경을 들여다보고 기도를 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화요일은 놓치면 수요일과 목요일이 있으니 그래도 안심은 되는데 목요일이 되고 금요일이 되는데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미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을 펴 들어도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정말 조급해 집니다. 조급해 지면 더욱 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주는 정말 설교를 죽을 쑤게 되고 중고등부 강대상에 서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목회자 무시에 대한 피해는 성도에게 돌아와

목회자들을 스트레스 받게 하면 고스란히 그 피해는 성도들인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들이 오로지 성령님에 의지해 영감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불필요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대로 된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를 듣고 일주일을 세상에 흩어져서 악한 영들과 대적하여 싸워야 하는 성도들에겐 올바른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고 세상에 나가는 것이니 세상에서 고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정말 목회에 전념할 수 있게 기도해 주고 협력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회자들을 배려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제압하려고 하는 행위를 절대 묵과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 하는 도전이며 목회자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며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갈6:7)

목회자가 뻔히 잘못가고 있는 것을 아는데 어떡하냐라고 항변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얘기를 해 주되 최대한 지도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일로던지 목회자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면 안됩니다.
일반 사람들도 자존감에 상처를 입힐 만큼의 충고는 좋지 않지만 특히나 목회자들은 그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면 고스란히 일반 성도들에게 돌아옵니다.
예의를 갖춰서 충고를 하였는데도 목회자가 고집을 꺽지 않고 계속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에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 더 무슨 축복을 바라겠습니까

목회자의 잘못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오늘날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성경 구약에도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하에서는 다윗의 교만의 발로인 인구 조사로 인하여 칠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습니다.(삼하24:15)
우리는 올바른 지도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와의 갈등으로 그 교회가 은혜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조용히 교회를 옮길 것을 권해 드립니다.
감사하게도 밖에 나가면 교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을 선택하여 나가면 그 교회도 평안할 것이고 자기도 계속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있는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무책임한 방법이 아니냐고요?
천만에요. 있는 동안 열심히 기도하며 눈물로써 호소해도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어찌 무책임한 방법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가지 않도록 우리는 열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성질만 낸다면 어찌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 필요

그렇다고 저는 무조건 목회자의 말씀이 옳다고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도 잘못 판단할 수 있고 언제나 그릇된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과 맞추어 보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지식으로 목회자들을 이리 저리 판단하여 잘잘못을 판가름한다면 100번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1번 틀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그 하나로서 그치지만 교회의 리더인 목회자에 대한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우리는 항상 성경을 가까이 두고 생활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도자인 목회자가 바른 길을 가느냐 아니냐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자답고, 장로가 장로답고, 집사가 집사다운 그런 교회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