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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신앙칼럼

[신앙칼럼] 지금은 분노할 때이다

한동안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임명 동의안이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양새가 참 요상합니다. 새 총리를 모시지 않고 기존 총리를 그대로 유임시킨다고 합니다. 2주간 한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는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합니다.

 

새총리를 모시던 기존 총리를 유임시키든 일단 사태는 마무리 되었으니 국가적으로 보면 다행이겠지만 이번 사태로 기독교계가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을 상대로 한 강연이 일반인과 언론에 의해 그대로 노출되었고 더우기 그 강연은 그들에 의해 이리저리 재단되고 평가되더니 교회를 더 몹쓸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들의 술수는 늘 그랬으니 이곳에서 논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오늘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기독인들의 태도를 말해 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우리는 그냥 물 건너 불 구경하듯이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이번 일이 어떤 일이었나요? 모양새는 문창극 후보자의 강연이었지만 궁극에는 교회에서 행한 강연이나 설교를 간섭한 것입니다. 간섭을 넘어 옳다 그르다를 판단했습니다. 교회의 설교나 강연이 그들의 판단대상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나 강연이 어찌 그들의 입맛에 맞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그것이 그들의 입맛에 맞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의 착각일 것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14~16)

 

신약시대 예수님의 설교에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당시 그들은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베드로, 바울, 스데반의 설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설교나 강연도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들리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번에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옳다 그르다 말합니다.

그 당시 우리는 분노했어야 했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분노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고 종교침해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말고 대한민국 어느 종교집단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이 있었습니까. 어느 종교단체는 대표자의 차량 트렁크를 검색했다고 온 종단이 벌떼같이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계의 대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집은 국민일보를 보는데 기독교 대표 신문이라고 하는 국민일보조차 일반 신문과 똑같은 논조를 내기에 바빴습니다.

 

기독교계의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침해하는데 기독교 이름으로 성명서 한번 낸 적 없고 의식있는 몇분이 개인 자격으로 신문에 칼럼을 낸 것이 고작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밥줄이 달린 종교과세에 대해서는 회의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더군요.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번에 제대로 빗장이 풀리고 먹혔으니 앞으로 더 큰 요구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나일 강가에 던져진 것은 단순히 한 아기의 버려짐이 아닙니다.

나일을 숭배하는 애굽과 하나님의 대리전이었습니다.

이번의 총리 후보자 검증 파문도 한낱 공직 후보자의 검증이 아니라 그들의 계산된 도발이고 침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교회가 그들의 저울에 올려져 이리저리 재단되는 것을 멍하니 구경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인들의 무지이고 무능이었습니다.

 

이제 심지가 약한 설교자나 강연자는 세상 눈치를 보며 원고를 작성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공격을 어찌 막아낼 생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