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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신앙에세이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어릴적 친구들사이에서 유행하던 '우리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 과대포장되었거나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믿고 비슷한 증상까지 동반하는 여성들의 상상임신만큼이나 내가 가진 믿음이 착각으로 인한 것이 아닌지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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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히브리어로 '기댄다, 의지한다'란 뜻이란다.
즉 쉽게 말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사물을 막대기로 지탱해 놓았을 때 그 막대기가 믿음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막대기를 빼버리면 즉 믿음이 없으면 필경은 넘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도 너무 잘 나가고 있지 않은가
사업이, 가정이 너무 잘되고 평온하지 않은가
그것이 함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없이 너무 잘 나가는 것은 허상이다.
바로 사상누각이란 것이다.
현재 잘 나가는 것같은 것이지 결코 잘 나가는 것이 아니다.
언제 바람이 불고 물이 스며든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위의 집.
그것이 믿음없는 자의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고백건대 나도 이런 딜레마에 빠질 때가 참으로 많다.
'도대체 내가 믿음있는 자인가'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질때가 많다.
교회에서 믿음 좋은 자라고 모두가 인정해주니 내 스스로가 믿음이 있는 자로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오류가 참으로 많다.
어떤 구체적인 믿음의 행위나 희생도 없이 내가 무슨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착각에 빠져 버렸다.
성경의 믿음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나온다.
이름만 들어도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오는 믿음의 거장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든 행위중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믿음으로 인정한 것이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11:8)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만큼의 믿음이 있는가
대학생때 제자훈련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북한에 침공을 당하여 북한군이 내 목에 칼이나 총을 들이대고 목숨을 택할 것인가 예수를 택할것인가'라는 질문에
훈련생들중 유일하게 예수를 택한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 대답은 아직 유효하다.
그러나 삶에 현장에서 나는 자주 자괴감에 빠진다.
'도대체 내가 믿음있는 자인가?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명의 구주로 인정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여러군데서 "그 열매로 그를 안다"(마12:33,마7:20,눅6:44,마7:16)고 말하고 있다.
믿음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내 삶의 현장에서 내 행위의 열매가 선한 열매이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비록 빛이 바래고 벌레가 먹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처절한 목마름으로 인한 열매라면 그 맛은 신맛이 아닌 달콤함이 있을 것이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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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오늘도 동일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나는 믿음있는 자인가?'

주여.

저의 믿음이 머리 속에만 머물지 말게 하시고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몸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라 " (약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