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고 나/신앙에세이

[신앙에세이] 목회자만 최고인가


평신도들에게는 목회자들이 알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가까이 가기에 너무 조심스럽고 그리고 왠지 그 앞에만 서면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바라만 봐도 은혜가 되는 존재, 바로 목사님들입니다. 이는 좋은 현상입니다. 구멍가게 아저씨에게서 느끼는 편안함보다는 왠지 모를 신비감이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기에 유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장인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직장을 탈출하고픈 꿈을 꾸듯이 평신도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방편으로 신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직장의 울타리가 있기에 그런 경우는 많이 적습니다. 문제는 여자들입니다. 성경을 읽고 큐티를 하다가 또는 한적한 집에서 깊은 기도를 하다가 은혜를 받고는 결론을 신학을 하는 것으로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부서를 섬기던 착하디 착한 여자 집사님께서 또 신학공부를 한다는 얘기가 솔솔 들립니다.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지만 믿을 수 있는 분이 한 말씀이라 잘못된 소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몇년 전에도 같은 부서를 섬기던 여자 집사님께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어느날 개척교회에 여자 전도사로 부임한다면서 기도를 부탁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기도 부탁이 부탁이라기 보다는 화이팅을 외쳐 달라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 분은 같은 평신도시절 농담도 하며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거룩한 전도사님이 된다고 하니 왠지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그 분의 학력의 짧음과 정리하지 못하는 어수선함을 아는지라 교회라는 조직과 평신도들을 지도하는 리더에 적합할까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일들이 말려서 될 일이 아니기에 대충 그러마고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 분의 모습이 저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즈음 어느 날 우리 교회 예배실 앞에서 예전처럼 다시 주보를 나눠주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전도사님 왠일이세요?
.... 아 예, 그....일이 좀 있어서 사역을 당분간 쉬기로 했습니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서로에게 교차했습니다.

해가 바뀌고 그는 예전의 미용실을 다시 열었고 이제 다시 같은 부서에서 동료 봉사자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왠지모를 거리감과 어색함. 지난 6개월의 간극은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칭도 그렇습니다. 6개월 정도 한 전도사 직분 때문에 '전도사님'으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예전처럼 '집사님'으로 불러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이번에 신학을 공부한다는 여자 집사님도 축하보다는 우려가 앞섭니다.
아마 천사가 우리 눈에 보인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착하디 착한 여자 집사님이 어떻게 교회라는 조직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겠다는 것인지 솔직히 걱정이 앞섭니다.

저는 평신도 생활을 접고 신학을 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사람을 보면 늦은 나이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매주일 열심히 교회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땀을 흘리며 봉사하는 평신도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천국에 가면 출입구 앞에 목사줄과 평신도줄을 따로 세우고 목사님들을 다 입장시키고 그래도 남는 자리가 있으면 평신도 중에 몇명을 뽑아서 남는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닐 것이라 봅니다. 만약 그렇게 줄 세우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자기 영역에서 주의 사명을 완수했는가로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사회는 어찌보면 신학교를 나와 목회자의 생활을 하는 것보다 몇배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리고 보람도 있습니다. 열매도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서로의 영역을 동경하여 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어려운 길을 자초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몰론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선택한 사람은 목회를 하여햐 합니다. 그러나 막연한 동경으로 자기의 자리를 떠나 다른 영역을 기웃거리는 것은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평신도가 좋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평신도 직분을 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