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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신앙칼럼

[신앙칼럼] 까마귀에게 배우랴?

5월 가정의 달입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어김없이 교회에서는 가족에 대한 각종 이벤트와 설교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때때로 설교에서 인용하는 예화들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바로 짐승들에 대한 예화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까마귀의 어미새에 대한 효도(?)이야기입니다. 이는 "반포지은(反哺之恩)"[각주:1]이라는 말로서 중국의 고전 효경(孝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효경은 유교 경전(經典)의 하나로서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弟子) 증자(曾子)가 효에 대(對)해 한 말을 적어 놓은 책입니다. 효에 대한 수많은 성경말씀을 제쳐놓고 유교 경전을 설교 시간에 인용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양식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표적인 것을 "반포지은(反哺之恩)"으로 들었지 그 외에도 적절하지 않은 예화가 너무나 많습니다. 은혜를 갚은 개의 이야기, 짐승들의 새끼에 대한 사랑 등등 너무나도 많습니다.
저는 짐승들에 대한 예화를 사람에게 대비시키는 것은 대부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짐승들은 본능에 충실해서 움직이는 것이지 사고하고 하는 행동들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시간에 이런 예화를 들으면 화가 납니다.
내가 짐승과 비교되는 것도 그렇고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낙인 찍히는 것 같아 심히 불쾌합니다. 아마도 하나님도 동일한 한탄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짐승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새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나 효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설계하신대로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미물입니다.
간혹 사랑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것일 뿐입니다.

어제 아침에 어항을 청소하고 부유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다 깜빡 물고기 밥 주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밥을 주려고 보니 한 마리가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니 자기 동료를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동료애는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물고기는 구피라는 어종으로서 새끼를 낳으면 재빨리 다른 어항으로 옮겨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새끼를 잡아 먹는 어종입니다. 그리고 물고기 3마리중 한마리는 돼지(?)같이 살이 쩌 있습니다. 물위에 물고기 밥을 던져 주면 힘센 한 놈이 반을 먹어 치우니 그 놈은 점점 비대해 지고 나머지는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짐승들이 효도를 한다고요? 정말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어릴 때 시골집 처마 밑에는 제비집이 있었습니다. 어린 우리는 그것이 신기하여 밤낮으로 그것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 보니 먹이를 주는 것에도 특징이 있더군요. 입을 제일 크게 벌리는 놈 입에 매번 먹이가 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몸이 약한 놈을 우선적으로 배려하여 갑절의 음식을 주겠지만 짐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먹이를 받아 먹고 힘이 좋은 놈은 계속 받아 먹고 못 먹어 비리 비리한 놈은 계속 비리 비리해 지는 것입니다.

닭은 어떤가요?

병아리 때는 어미가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에게도 달려 들고 몸집이 몇 배가 되는 개에게도 털을 치켜 세우고 덤벼 듭니다. 그러다가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혼자 먹이를 먹을 정도가 되면 어미는 새끼가 가까이 오면 부리로 쪼아 내쫒고 맙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새끼와 먹이를 두고 피터지게 싸우기도 합니다. 이것이 짐승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동물들처럼 효도를 하라고요?
우리가 효도를 해야 함은 맞는 것인데 동물에는 비교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잠언의 말씀에 "개미의 행동을 보고 지혜를 얻어라"(잠2:6)고 했지 개미를 본받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못해도 개미보다 낫고 아무리 못해도 까마귀보다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2:7)

  1. 새끼 까마귀가 성장한 뒤에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은혜를 갚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