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성경묵상
[성경묵상] 히스기야의 통곡
이바구™ -
2010. 12. 10. 11:09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몇군데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에 대한 부분이다.
누구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컸었을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왜 생명연장을 두고 하나님께 담판을 짓다싶이 기도를 했을까 하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2)
우리는 이 땅에서의 생명이 다하면 천국에 들려 올려진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성경에서만 읽었던 아브라함을 만나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있을 사도 바울도 만나게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천국에 올라갈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
이 땅에서 어떤 부귀 영화가 천국에서의 하루에 비견할 수 있을까.
신자된 우리는 마땅히 오매불망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주위에서는 히스기야의 통곡과 비슷한 울음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헷갈린다.
얼마전에 한국 기독교에 큰 업적을 남긴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을 떠나셨다.
그런데 그 분을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분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저 통곡은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인가 아니면 항의인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아니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기고 목사 은퇴를 하셨으며 70이 넘은 나이에 소천을 하셨다. 그가 배출한 많은 제자들이 한국 교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어야 하지 않을까
당사자는 물론 그를 아는 많은 분들이 축하하고 축하의 꽃다발이라도 전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좋아하고 축하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히스기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벽을 향하고 통곡을 한다.
짐짓 하나님께 메어 달리는 것으로 비친다.
도대체 히스기야의 통곡은 무엇일까?
그냥 단순히 살고픈 인간의 본능일까, 아니면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에 대한 왕으로서의 책임감일까?
성경에 대한 의문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열왕기하에서 히스기야의 통곡기도 후에 이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 부분을 살펴 보자.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선지자 이사야의 대언(왕하 20:6)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하20:20)
우리가 한 가지 일로 여러가지 이득을 취하는 것을 흔히 1타(打) 몇피라고 한다.
히스기야는 애끓는 통곡 기도로 1타 3피를 이룬 것이다.
특히 위에서 살펴 본 은혜중 3번째 히스기야에게 기회를 준 것은 대단한 은혜이고 축복이다.
우리가 중요한 시험을 치룰 때 다른 사람보다 10분더 시간을 허락받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 어마한 혜택이다.
우리가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짓게 될 때 그냥 분위기에 젖어서 울음을 터트린다면 하나님과 주위 분들에게 엄청난 실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섭섭함이나 항의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부르심이 나에게 갑자기 임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준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에 대한 부분이다.
누구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컸었을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왜 생명연장을 두고 하나님께 담판을 짓다싶이 기도를 했을까 하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2)
우리는 이 땅에서의 생명이 다하면 천국에 들려 올려진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성경에서만 읽었던 아브라함을 만나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있을 사도 바울도 만나게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천국에 올라갈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
이 땅에서 어떤 부귀 영화가 천국에서의 하루에 비견할 수 있을까.
신자된 우리는 마땅히 오매불망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주위에서는 히스기야의 통곡과 비슷한 울음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헷갈린다.
얼마전에 한국 기독교에 큰 업적을 남긴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을 떠나셨다.
그런데 그 분을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분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저 통곡은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인가 아니면 항의인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아니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기고 목사 은퇴를 하셨으며 70이 넘은 나이에 소천을 하셨다. 그가 배출한 많은 제자들이 한국 교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어야 하지 않을까
당사자는 물론 그를 아는 많은 분들이 축하하고 축하의 꽃다발이라도 전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좋아하고 축하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히스기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벽을 향하고 통곡을 한다.
짐짓 하나님께 메어 달리는 것으로 비친다.
도대체 히스기야의 통곡은 무엇일까?
그냥 단순히 살고픈 인간의 본능일까, 아니면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에 대한 왕으로서의 책임감일까?
성경에 대한 의문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열왕기하에서 히스기야의 통곡기도 후에 이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 부분을 살펴 보자.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선지자 이사야의 대언(왕하 20:6)
하나님은 세가지 부분을 해결해 주셨다.
히스기야가 왕으로서 해결하지 못한 조국 이스라엘의 안위를 하나님이 직접 챙기겠다는 확답을 받은 것이다.
완벽한 해결책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이스라엘의 존립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확답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히스기야는 연장받은 십오 년 동안 그의 뒤를 이을 아들 므낫세를 낳았다.(왕하21:1)
왕으로서 후세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치욕이고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범죄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면해 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업적을 마무리할 기회를 주셨다.
히스기야는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에 인도하여 들이는 등 그의 업적이 역대 지략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준비도 없이 죽음을 맞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히스기야가 왕으로서 해결하지 못한 조국 이스라엘의 안위를 하나님이 직접 챙기겠다는 확답을 받은 것이다.
완벽한 해결책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이스라엘의 존립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확답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히스기야는 연장받은 십오 년 동안 그의 뒤를 이을 아들 므낫세를 낳았다.(왕하21:1)
왕으로서 후세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치욕이고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범죄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면해 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업적을 마무리할 기회를 주셨다.
히스기야는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에 인도하여 들이는 등 그의 업적이 역대 지략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준비도 없이 죽음을 맞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하20:20)
우리가 한 가지 일로 여러가지 이득을 취하는 것을 흔히 1타(打) 몇피라고 한다.
히스기야는 애끓는 통곡 기도로 1타 3피를 이룬 것이다.
특히 위에서 살펴 본 은혜중 3번째 히스기야에게 기회를 준 것은 대단한 은혜이고 축복이다.
우리가 중요한 시험을 치룰 때 다른 사람보다 10분더 시간을 허락받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 어마한 혜택이다.
우리가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짓게 될 때 그냥 분위기에 젖어서 울음을 터트린다면 하나님과 주위 분들에게 엄청난 실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섭섭함이나 항의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부르심이 나에게 갑자기 임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준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